Oh Jhin Ryung
오진령은 길의 감식가이다. 그녀는 3년을 떠돌아 다녔고, 유랑 극단을 사랑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커스 단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 누구든 광대 아닌 이가 어디 있겠냐만은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의 전작 <곡마단 사람들>에는 흔히 곡마단에서 연상되는 비릿한 내음은 찾아 볼 길이 없다. 독안에서 얼굴을 살포시 내민 곡예사, 환한 조명 밑에서 접시를 돌리는 사람들. 모두가 화려한 불빛 아래 육체라는 ‘살-곡예기계’의 정지 순간에 몰두되어 어떤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오진령의 <곡마단 사람들>에는 애수어린 표정으로 화장을 지우거나 비오는 날 천막 밖으로 바끔히 얼굴을 내미는 그런 비린내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춘기부터 써커스라는 광대놀음을 피부 깊숙이 밀착함으로써 아니 육화됨으로써 오진령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곡마단의 ‘비천함, 애수, 기이함’의 도식을 넘어 설 수 있었다.

그런 오진령이 이번에는 사람들 대신 인형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거미 여인의 꿈>은 그녀가 <곡마단 사람들> 이후 3년만에 내 놓는 사진들이다. 어릿광대를 찍었던 오진령과 유랑 극단을 찍었던 오진령. 이제 그녀 자신이 어릿광대 인형이 되어, 스스로 유랑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닌다.

<거미 여인의 꿈>속에 있는 오진령은 다리 한쪽, 팔 한쪽만 남은 채 인형의 얼굴로 관객들과 숨바꼭질을 한다. 자기 자신이 모델이자 피사체가 되었는데도 자기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한다. 쌓여진 돌틈 뒤에 숨어 있는 인형들은 ‘나 잡아 봐라’고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꽃밭 한 가운데 얼굴만 내민 인형은 어딘가 공간의 예각속에 푹 뭍혀 있기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때 오진령의 인형들은 생래적으로 취득한 ‘인위성’ 때문에 배경이 되는 자연물들과 섞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길가에서 두 팔 벌리고 오래전부터 그렇게 서 있는 허수아비의 모양새로 태초부터 자연스러웠을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그 기이한 모순성, ‘어디선가 본 듯한 낯설음’ 이라 부를 수 있는 데자뷔 현상이 오진령의 어린 시절의 꿈길을 이끌어 낸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내용은 알길 없지만 이 땅의 대지를 당당히 뚫고 나와 세상밖으로 비죽 내민 그녀의 다리 한쪽, 팔 한쪽이야말로 자신의 무의식적 근원을 뚫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숨겨진 또 다른 자아이다. 두 팔 뻗어 세상에 수맥을 끌어 올리는 또 다른 ‘봄 나무’ 들이다.

그래서 <거미 여인의 꿈>은 오래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오진령의 작품세계에서 세상밖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구상의 세계에서 추상의 세계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작걋?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그리하여 텅 빈 길, 가로수가 마치 터널처럼 보이는 그 빈 공간에서 오진령은 이제 저 멀리 혼자 뒷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은 너무 멀리 있어서 따라 잡기는 숨가뿔 것 같고 하지만 왠지 성큼성큼 다가가 그 어깨를 돌려 앞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한 뒷 모습. 그 순간 오진령은 또 한 무더기의 나무를 끌고 다닌다.

왠지 그 나무 무더기의 무게가 너무 힘들어 보여도 오진령을 그냥 내 버려 두자. 검은 원피스 차림으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그녀가 자살을 하려는 건지 세상으로 붕 떠오르고 싶어하는 건지 알 수 없어도 거기 그렇게 그냥 두고 떠나자.

왜냐면 언젠가 오진령은 ‘인형의 삶’으로부터 파과하여 오색의 찬란한 무지개로 세상의 공기를 다시 들이 마쉴 날이 올 것이기에. 그때까지 당분간 우리는 오진령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길을 떠나고, 세상 모든 돌들의 갈라진 틈을 핥으며, 그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억과 최면의 공기에 이끌려 다니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 한다.

비단 나무 위에서 한 시절을 보내는 짐승이 킬리만자로의 표범만은 아닐 터이니...

<거미 여인의 꿈> 그 길의 이정표에 오진령이 스스로의 이름을 새겨 넣고 있다. 어릿광대의 탈을 쓰고 우는지 웃는지 알 길 없는 꿈을 자꾸 자꾸 토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