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Jhin Ryung
엄연한 사진의 거장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사진들이 ‘찰나’라는 위대한 단어를 차치하고서라도 ‘작품’의 단상에 오르게 된 것은 괴테가 그토록 부르짖은 어둠과 밝음의 경계를 완벽히 변주한 것에 있을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대가들이 그들의 비유기적 창조물들을 고안해 낸 그 위태로운 경계선에서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파우스트와는 다르게, 이 시대의 수려한 뱀파이어들은 창백함만으로는 더 이상 영혼을 강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분위기를 압도하는 어둠은 기술의 발전으로 창창하고 진보적인 빛으로써, 일그러진 화상의 상처를 치료했으며, 그로 인해 그 빛은 때로는 오히려 더욱 캄캄해지기도 했다. ‘어둠의 노스탤지어’처럼 말이다. 다시 브레송의 사진으로 돌아와서, 그가 만일 생을 조금 더 연장했다는 가정 하에서 오진령의 사진을 보았다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그리고 자신의 ‘색채론’을 거의 유일무이한 이론으로 자화자찬 했던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이미 흑과 백의 경계를 완전히 뛰어넘은 그녀의 사진에 대해서 어떻게 일침을 놓았을까? 더 이상의 유령들이 활계를 칠 수 없는 태양볕 아래 한 단계 차양을 친 오진령이라는 작가에 대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브레송: 그녀는 찰나를 찍고 있군. 봐, 저기 그녀의 다리가 허공에 매달려 있어. 그녀는 점프를 하고 있는 거라고.
괴 테: 그렇군. 그녀는 점프를 하고 있군. 그러나 역시 틀렸어. 위대한 순간은 경계에서 이루어져야 그 숭고미가 드러나는 것이지. 그녀는 아직 애송이야. 안 그러나? 경계를 넘어서면 결국 망상이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허무의 피안(彼岸)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지.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무식하다고 하지는 말게나. 자네도 흑백의 이미지를 선호하지 않나. 그녀는 색을 입히지 말았어야 했어.
브레송: 그렇지, 나는 빛과 어둠, 즉 사물이 순순히 자신을 드러내는 때를 포착하는 것을 중요시 하지. 그러나 자네, 그것을 알고 있나? 나는 단지 사물이 자신을 드러낸, 그러니까, 자네 앞에 있는 재떨이의 순간을 찍는 것이 아니라네, 내가 찍은 것은, 그것들이 내게 전해준 수많은 이미지들 중에 어느 한 점일 뿐이라네. 나의 경계는 단지 빛이 어둠을 드러낸다든가, 아니면 어둠이 빛을 도드라지게 하는 대비의 관계가 아니라네. 내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완벽한 대답이 더 이상의 질문을 불필요하게 만들기 직전의 상황이라네.
괴 테: 그러니까, 수많은 질문들이 소멸될 시점을 포착한다는 자네의 말을, 빛이 자신이 출발했던 이미지로 회귀하는 그 지점을 자네가 지연시키고 있다고 이해해도 좋겠는가?
브레송: 그렇다네. 나는 그 사라질 현상들을 사각 틀에 사로잡고 있는 것이라네. 이런 나를 ‘미련의 왕’이라 욕해도 좋네. 나는 단지 남들이 볼 수 없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1세기를 다 채우지 못한 95년의 생애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네. 그러고 보니 자네야 말로, 자네의 말을 빌어 ‘위대한 색채론’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생리색’에 대해서 말일세.
괴 테: 생리색은 눈 속에 있는 빛이 내부 혹은 외부로부터 오는 미세한 자극에 의해 고유한 색채를 촉발하는 것을 말하지. 하지만 이것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라는 원현상(原現像 Urphänomen)에서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면 단순히 인위적이고 혹은 추상적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점을 오진령이라는 작가에게 말하고 싶네. 나는 사진을 잘 모르네만, 모든 예술 작품은 우연의 순간을 담아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의 조형물들과 선정적이라 할 수 있는 팔레트를 벗어난 색들은 이미 색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그런가?
브레송: 이보게, 팔레트를 벗어난 색은 정녕 색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아 낼 수 없는 내 입장에서는 사진은 한낱 복사물에 지나지 않는 슬픈 현실이겠구먼. 그러나 우리는 모두 우연을 담기 위해 ‘필연적인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기계이건 또는 기계에 담아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마니치노건 간에 말이지. 사진적 행위라는 용어를 빌리지 않고서도 우리네 ‘장이’들이 하는 일이란 필연적 행위로서 우연의 간극을 줄이자는 것이지. 정신 차리게. 나는 바로 자네의 생리색에서 그것을 읽었단 말일세.
괴 테: 알았네, 알았어. 나도 알고 있다네. 다만 나는 우연성, 즉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직관에 의존하는 우리네 유령같은 예술가들의 입장이 포스트모던한 이 시대의 젊은 작가들에게 망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것을 흉내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네. 그런데, ‘필연적 우연’이라는 말, 참으로 맘에 드네 그려.


우리는 세기를 뛰어넘고 또 사조(思潮)를 뛰어넘은 두 대가의 대화를 엿들었다. 비록 가상이긴 했지만 ‘인용의 유령’이 된 그들의 이런 대화는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모든 경계에 서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큼 피로한 것은 없다. 우주를 생성하고 있는 온갖 대상들이 저마다 내보내는 이미지의 쟁(諍)에서 우울한 피로를 느끼는 것은 데니스 홀리어Denis Hollier의 말대로 수도사의 나태(acedia)에 가까운 신경증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오진령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른함과는 다른 피곤함이 몰려온다. 그것은 충돌을 앞둔 신체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며, 또 정신의 예비단계인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러하듯, 사진에 있어서도 작가의 개인적 이야기가 작품 속에 침전물로 부유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무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의도된 과정으로서 의식 저편의 무언가에 두레박을 던지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오진령의 사진은 특별한 구석이 있다. 우연을 창출하기 위해서 필연적 요소를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우연의 상황은 그녀의 무의식을 넘은, 무의지의 상황연출에서 생성되는 또 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괴테가 말한 ‘생리색’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첨언하자면 빛과 눈 사이의 작용․반작용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것, 마니치노들의 출현으로 유기적이었던 대상과 작가의 관계는 충돌을 맞게 된다. 그 충돌은 더 이상의 질문이 있을 수 없는 완벽한 대답을 지연시킨다. 이러한 지연은 불완전성의 위태로움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이다. 사지가 잘린 팔, 다리의 파편들은 위험의 최절정으로, 오직 위기의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롤러코스터 효과를 선사한다. 광대들에게 노출돼 있는 작가는 그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무를 타고, 모래사장에서 수없이 점프를 하는 등 유년의 퍼포먼스들을 행한다. 그리고 또한 어릿광대들은 자신들의 시선이 머무른 작가의 행위 뒤편에서 잿빛의 날렵한 또 다른 마니치노들에 의해 역으로 노출된다. 이렇게 확장된 노출은 결국 카메라라는 필연적 도구에 의해 그들의 관음증적 놀이를 한 순간에 무대 위로 올려놓는다. 그들의 그런 놀이는 절대로 술래와 참여자들을 매끄럽게 이어주기 보다는, 오히려 포획된 이미지들은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경계를 풀지 않는 동물적 본능이 위험을 완성시켜 나가고 있듯 말이다. 물론 오진령의 사진적 행위들은 완료된 상태는 아니며 오히려 게임오버를 두려워하는 시선들로써 놀이를 지연시킨다. 그것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자신의 방에 들어앉아 화장대에서 홀로 화장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을 연상케 한다. 거울 속에 비춰진 것은 주인공과 관객의 얼굴이다. 그러나 연극은 주인공의 얼굴만을 요구한다. 이는 별들이 언제나 ‘거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낮에는 투명해지는 이중도관(二重導管)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

오진령의 사진에서 원색의 사물들은 작열하는 태양볕을 피하기 위해 차양아래 잠시 몸을 숨기듯 그늘을 입힌 색들로 드러난다. 강렬하면서도 어딘가 창백해 보이는 그것들의 색채는 잿빛의 마니치노들에게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한 잿빛의 인형들은 오진령이 그녀의 처녀작에서 그토록 열광했던 곡마단의 붉은 천막 안 이미지들을 연상케 한다. 그 이미지들에게 있어서 정작 불안감을 조성하게 했던 것은 공중곡예가 아니라, 곡마단 소녀들이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립스틱을 바르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역광 속에서 비로소 실루엣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작가는 빛을 등진 자신의 소박한 그림자 속에서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그때를 우직하게 기다리고 있다. 별이 없는 벼락같은 하늘 아래, 그녀의 자궁을 뚫고 태어난 인형들과 함께 말이다.